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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불빛 , 창
아니, 창 너머의 이야기

장하윤은 집을 그리는 작가다. 아니, 불빛이 흘러나오는 창을 그리는 작가다. 아니, 창 너머의 집을 그리는 작가다. 아니다. 장하윤은 그 너머를 그리는 작가다.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작가는 “나의 작품은 ‘집’에서 출발합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집(House)의 외관이 아닌, 창에 주목하고 창 너머로 흘러나오는 빛에 집중하고 있으며 창은 하루의 출발점이자 다시 귀결되는 점이라고 한치의 주저도 없이 명확하고 똑부러지게 설명했다. 그리고 몇 개의 해시태그를 제시했다. #집(home), #삶 #균형 #창문 #밤풍경 #위안 #위로. 이렇게 명확하게 자신의 작품을 잘 정리해서 말하는 작가의 작품에 무엇을 더해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의 그림에서 무엇을 더 볼 수 있을까. 글쓰기가 꽤 어려워지겠다 짐작했다.

 

창-안에서 밖으로

대학생 장하윤은 해외여행이 가고 싶었다. 여행을 위해 따로 마련한 돈은 없었다. 배를 타고 가는 일본 여행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일반 객실, 저렴한 배값처럼, 자리는 배 가장 아래쪽이었다. 창문도 없는 다인실이었다. 갑자기 갑갑함이 몰려오고 숨쉬기도 힘들어졌다. 객실을 나와 돌아다니다 우연히 배 안의 목욕탕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동그란 창문이 있었고, 창문 너머로 바다가, 수평선이 보였다고 했다. 그제야 숨통이 틔였다.

 

그 날, 배 안에서 그 작고 동그란 창문은 장하윤에게 말 그대로 ‘숨통’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창에 대한 그의 집착의 시작이기도 했다. 배 ‘안’에서 배 ‘바깥’의 바다를 볼 수 있던 창은 일종의 경계였고, 위로였고, 안도였던 것 같다. 2009년 작품 <바람이 불어오는 창> 역시 안에서 밖을 내다 보는 시선의 창이다. 창틀이 명확하게 보이고, 창 밖엔 파란 하늘이 있다. 일본을 향해 가는 배 안에서 장하윤이 보았던 바다도 그런 푸른 빛이었을까? 작고 동그란 창에서 올려봤던 하늘도 그렇게 파랗고, 하얀 구름이 있었을까? 하얀 벽에 걸린 세 개의 <바람이 불어오는 창>은 답답하고 하얀 갤러리 벽에 하늘을 만들어 내었다. 숨통을 열었다. 그는 안에 있었고, 밖을 내다 보고 있었다.

 

집-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또래 작가들이 그렇듯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꿈은 있었지만, 미래는 명확하지 않았다. 생계를 위해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고,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재료비로 다 써버렸다. 과연 달라질 수 있을까하는 불안도 컸을 것이다. 누군가는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녁에 장하윤은 지친 일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길에서 만난 불켜진 창,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은 위로였다.

캔버스 가득 창틀을 그리고, 안에서 밖을 바라보던 시선은 이제 거리에 멈췄다. 아니 이제 그는 밖에 있고, 자신에게 위로를 주는 창 너머 안쪽을 바라본다. 자신의 모습은 한결 작아진 것 같았지만, 거리에서 바라보는 집,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에서 왠지 모를 따뜻함을 느꼈다. 그리고 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종이봉투로 집을 만들고, 창을 뚫고, 그 안에 LED 조명을 넣어 불을 켰다. 종이봉투 집들이 모여 마을이 되었다. (<밤의 정원> (2013-2022)). 그렇게 한동안 그는 집을 만들어 관객과 만났다. 때론 동화속 집을 만들었고, 때론 아파트를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집은 다양하게 변주되어 관객에게 다가갔다.

 

창-밖에서 안으로, 그 너머

빛은 빛만을 이야기한다. 빛은 그 이상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아무리 변주를 한다해도, 집이라는 형상에 매여서는 그 이상을 말하기 어렵다. 종이로 집을 만들고, 뚫어서 창을내고 하던 그가 다시 회화로 돌아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생각된다.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집’도 ‘창’도 아니는 집과 창을 통한 그 너머였을 테니까.

<저 너머> (2013-현재)에서 캔버스는 파사드가 된다. 단색조의 파사드를 만들기 위해 겹겹이 색을 쌓아간다. 완성된 작품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화려하고 다양한 색들이 바탕에 깔린다. 그리고 그 위에 계속 덧데어 칠한다. 그 모습이 마치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가며 집을 만드는 모습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구축된 파사드에 사각의 창이 만들어지면, 전기로 만들어지는 ‘빛’이 아닌 다양한 색을 담은 빛이 드러난다. 오렌지 불빛이 되기도 하고, 노란색 불빛이 되기도 한다. 인물도 없고, 드라마틱한 전개도 없지만 그림 ‘밖’에 선 관객은 창을 통해 창 안을 상상하게 된다. 창 밖에 선 장하윤이 상상했던 그런 상상, 창 밖에 선 장하윤이 느꼈을 감정을 떠올려본다. 붓질을 통해 스쳐가는 바람의 숨결을 느끼기도 하고, 묵직한 파사드의 색 앞에서 먹먹해지기도 하며, 창을 통해 배어 나오는 화려한 색상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캔버스 옆으로 흘러나온 화려한 물감은 지금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보이는 것 그 너머에 담겨있는 많은 이야기를 이야기한다. 그림은 그렇게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장하윤의 그림에서 누군가는 빛을 보고 생명을 읽기도 하고, 집을 보거 하이데거의 거주함을 보기도 한다. 건축과 창을 보기도 하고, 낮과 밤, 그리고 그 사이의 시간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그림 앞에서 자꾸 그림 너머의 장면이 보이고,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때론 가사와 육아, 작품 활동사이에서 지치고 힘들었을 작가의 마음이 그림 위에 눌러 앉아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하기도 하다. 화려하고 채도 높은 색들을 한껏 올려세워 놓고 짙은 회색으로 덮어버리고는 작은 사각형을 통해 원래 이런 색들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 옆으로 슬쩍 흘러내리는 물감에서 스스로에게 엄격하다던 그의 이야기가 다시 들리는 것도 같다. 과연 그 끝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그 너머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그림 앞에서 그림의 옆을 보며, 그가 서 있었을 새벽의 거리를 상상한다. 새롭게 하루를 열어가는 누군가의 새벽을, 힘겨운 하루를 마감하는 누군가의 밤을 상상한다.

신보슬 (큐레이터)

대구예술발전소 입주작가 결과보고전 │202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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