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허공에 세운 집

장하윤은 ‘그 너머’를 꿈꾼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도시의 아파트, 그 어딘가에 불 하나를 밝히기 위해 질주해온 삶이 깃든 공간이다. 빛은 작가에게 안식의 다른 말이다. 생존을 위해 밖으로 내몰린 삶의 귀가를 이끄는 등불이고 삶을 밝히는 희망이다. 장하윤은 빛으로 거주함을 건축한다. 콘크리트의 견고한 물성을 지닌 건축물은 물러나고 빛이 자리한 공간은 화면 위에 색면으로 자리한다. 형광색 주위를 둘러싸며 쌓아 올린 물감의 층에 의해 드러나는 것은 빛이다. 그것은 열을 지어 늘어서 있기도 하고 물의 일렁임에 흔들리듯 굽이치기도 한다. 장하윤의 작업은 건축물이 아닌 빛으로 떠오르게 한다. 집은 타인의 시선 너머에 있는 나만의 공간이다. 그리고 그 집은 빛으로 있다.

 

장하윤에게 빛은 거주함이다. 빛은 어떤 존재가 자리해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거주함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건축함이 아닌 건축함이 그 자체로 거주함이 되는 지점에 자리해 있다. 하이데거는 건축함의 본질을 거주하게 함에 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 말로 하자면 몇 평의 공간을 점유하고 어떤 이름의 공간에 들어간다고 거주하는 게 아니다. 어떤 것을 지었기 때문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주하는 한에서만 건축함이 있게 된다. 거주함은 그것의 본질 안으로 울타리 쳐진 채 머물러 있음을 의미한다. 그 울타리는 보살핌과 자유의 영역이다. 라투르의 말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생명 위에서가 아니라 경제 위에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나의 있음에 자리하지 못하게 한다. 작가의 거주함은 본연의 자리에 대한 상실감으로 찾게 된 자리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우리 각자가 거주하고 있는 땅의 참된 의미와 이 땅에 있음의 참된 의미를 회복할 때만 비로소 고향 상실이 극복된다고 말한다.

 

작가에게 빛을 담는 작업은 있음의 자리를 묻는 일이다. 규격화된 크기로 늘어선 창을 통해 흘러나오는 빛은 자연의 빛이 물러간 자리에 떠오른 인공의 빛이다. 그 빛을 통해 작가는 자기의 삶을 그린다. 아니 우리의 삶을 그린다. 때로는 선명한 색으로 떠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바람에 스치고 물결에 휩쓸린 듯 흐려지기도 한다. 때로는 빛은 아득하게 멀어져 흔적만 겨우 남기도 한다. 지친 어깨를 끌고 각자 자신의 빛을 찾아 돌아가는 우리의 나날이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일상에서 누구와도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화답할 때도 있고 홀로 자기의 세계에 침잠할 때도 있다. 그것은 멀리에서 온 빛이 아니라 각자의 삶이 밝힌 빛이다. 하나의 공간에 하나의 빛이 자리한다. 아래와 위로 이어져 있고 좌우로 이웃한 수많은 불빛 속에 세계 내의 존재로서 있다. 똑같은 크기의 틀 속으로 서로 다른 빛을 담고 있다.

 

작가의 관심은 견고한 콘크리트 벽체가 아니라 안과 밖을 잇는 창으로 비친 빛이다. 종이봉투를 이용해 반 입체의 작품을 만들거나 나무 재질을 이용해 입체 작품을 만들 때조차 아파트를 형상화한 구조물은 빛을 담음으로써 의미를 지닌다. 동일한 크기의 창은 열림과 닫힘 등을 통해 빛을 투과하는 빛의 양을 달리함으로써 다른 공간으로 다가오게 한다. 화면을 구성하는 빛도 색을 혼합하여 만들어 그려 넣는 기법이 아니라 비움으로써 빛을 담는다. 물감으로 형상을 채색하는 것이 아니라 물감을 쌓아 올리고 남겨진 자리에 빛이 들어서게 한다. 그 빛은 가장 아래에 이미 간직된 것이다. 가장 밑바닥의 색이 빛의 존재를 담은 사각형의 도형으로 나타난다. 중첩된 물감은 현실의 시간이기도 하고 화면이 형성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본질적인 존재의 빛을 잃은 상실의 시간이기도 하다. 빛은 경계 바깥의 물감의 쌓임과 빛이 자리한 공간을 흔들 듯 지나간 붓 자국으로 인해 빛은 다양하게 변주된다.

 

빛은 생명이다. 우주에서 빛으로 인해 생명의 시작되었다는 것에서부터 존재 자체의 의미까지 빛은 생성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인공의 빛의 발명은 더 많은 생산을 위해 닦달당하는 삶에 처함으로써 자기 상실의 시대를 살게 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인 의미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장하윤에게 빛은 세계 내의 존재로서의 자신을 회복하고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공간을 의미한다. 본연의 자신을 돌보는 공간이며 새롭게 생명을 불어넣는 공간이다. 타인과의 삶 너머에서 나를 회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장하윤은 어딘가에 있는 먼 곳이 아닌 지금 여기, 창백한 도시의 허공에 자리한 삶에서 그 너머를 불러들인다.

 

│배태주│평론│미학│20221105│

bottom of page